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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에는 관객이 필요하다

한국 애니메이션에는 관객이 필요하다

- 이현진 (애니메이툰 기자)



9월 27일, 정신없는 마감으로 부산국제영화제 프레스 아이디 신청을 놓친 것이 사무치게 후회되는 일이 생겼다. 아니, 마감은 핑계였고 충분히 인터넷으로 예매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매가 시작된 27일 오후 5시로부터 10분 만에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이 보란 듯이 매진됐다. 클릭해 볼 새도 없이. 덕분에 상영 당일, 새벽 5시30분 출발하는 KTX 첫 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남포동에서 표 한 장을 구하기까지 3시간 동안 피 마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중한 날의 꿈'의 개봉을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제작 7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하는 자리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영화제의 열기가 개봉관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을 보려고 이렇게 분투하다니 썩 괜찮은 고생이었다.

작년에 본영상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고스트 메신저'가 상당한 팬층을 만들어냈을 때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몇 장 공개되지 않은 스틸 컷을 따라 그리는 것은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독점이다시피 했던 코스프레에서 강림과 사라도령이 발견되기도 했다. 좋은 기조인 것 같은데, 별로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관객’과 그들의 ‘열기’ 같은 것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한국 애니메이션의 선전은 사람들에게 별 체감이 되지 않아왔다. 얼마인지도 가늠이 잘 되지 않는 달러가 오가는 해외와의 계약체결 소식으로만 보자면 한국 애니메이션은 펄펄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찬바람 부는 극장의 현실은 오히려 불황이 체감될 정도로 관객이 턱없이 적다. 얼마 전 꽤 잘 만들어졌던 애니메이션 '마법 천자문'의 경우 1200만부 팔린 원작과 에듀테인먼트를 좋아하는 엄마들의 티켓 파워에도 12만 명을 겨우 넘겼다. 한국 애니메이션에 실제로 돈을 주고 구매하는 ‘관객’이라고 할 만한 층이 굉장히 얄팍하다는 사실은 이렇게 매번 증명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곧 모습을 드러낼 '소중한 날의 꿈'과 '고스트 메신저'에 대한 기대에는 침체됐던 한국 애니메이션을 부흥시키려는 각오가 다분히 섞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대 끝에 낙하는 그 폭이 더 큰 법이다. 이미 수십 억 원대의 대작도, 해외 영화제에서 금의환향한 수상작도 이렇다 할 관객을 얻지 못했다. 산고 끝에 국산 애니메이션이 개봉할 때마다 사람들은 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침체기 탈출 여부를 가늠했다. 하지만 ‘영웅’은 나오지 않았고,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애니메이션 수렁의 깊이는 더 깊어졌다.

아마 그런 전례 때문에라도 대충 만들어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힘이 되는 만큼 부담도 되는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두 작품의 제작사들은 완성 시기를 계속 늦추며 공을 들였다. 덕분에 슬쩍 엿본 두 작품의 퀄리티는 제작 초기의 프로모션 영상보다 시각적으로 더 나아져 있었다. 아직까지는 높은 기대치가 순기능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사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대해주는 팬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좋다. 하지만 왠지 다시 한 번 한국 애니메이션의 심판대에 오르는 풍경인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구세주가 아니라 구매자, 즉 관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구매하고 싶은 층이 생겼다는 것은 꽤 고무적이다. 지금 당장 공개를 앞두고 있는 두 한국 작품의 역할은 몇 백만 관객몰이가 아니라 관객의 욕구가 시장을 형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 것도 없던 곳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면 그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생기고 순환구조가 마련될 수 있다. 관객의 역할은 물론 정당한 소비다. 거창하게 애국심까지 들먹일 것 없이 콘텐츠가 마음에 들면 구매하면 된다. 꽤 오랫동안 불법 다운로드가 만연했지만 이제 유료 콘텐츠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기반을 잡아가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진짜 관객이 된다면 관객들도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작품을 계속해서 볼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관객이 극장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장편보다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으며 한국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외쳐온 건 단편 쪽이다. 엄밀히 따지면 단편이나 독립 작품의 성격은 상업적인 목적이 우위에 있는 작품과 다른 층위에 있지만 이쪽에도 관객은 필요하다. 후자의 관객이 시장을 형성한다면, 전자의 관객은 다양성의 확보를 돕는다. 오히려 시장의 논리보다 제작자의 욕구가 강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여러 취향을 실험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 작은 영화는 영화의 만듦새가 꼭 돈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기도 하다. 현재 저예산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좋은 선례가 생긴다면 몇 백억을 쏟아 붓고 실패해 다른 애니메이션 투자의 모든 통로까지 차단해버리는 무모한 광경을 목격하는 일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같던 한국 애니메이션에도 관객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가 여러 군데 있어 보인다. 특히 단편, 저예산 작품 쪽은 제작을 넘어 상영기회를 넓히는 지원이 계속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시장을 형성해 나가는 보폭은 글로벌 콘텐츠 계약 체결 한 걸음에 비해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당장 많은 돈이 오가지도 않는다. 무려 ‘신성장동력’이라는 수식이 붙는 콘텐츠 분야의 분기별 혹은 연간 실적으로 따지기에 민망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에 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은 글로벌 파트너나 수백억의 제작비보다 관객에게 있어 보인다. 추측컨대, '소중한 날의 꿈'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척박한 한국 애니메이션판에서 포기하지 않고 진국 같은 작품을 완성하도록 만든 힘의 팔 할은 팬들에게 있을 테니까.

전 지구인을 감동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우선이 되고, 비즈니스가 아닌 제작자와 관객의 욕구로 시장을 만들어, 팬이 정당한 소비로 관객이 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다시금 한국 애니메이션은 체감할 수 있는 문화가 될 것이다. 10분 만의 매진 사태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팬카페 등에도 놀라지 않을 만큼.


출처: 콘텐츠진흥원




소중한 날의 꿈과 고스트메신저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풀이하면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는가를 우선으로 해야 함으로 해석할 수 있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 풀이하면 정당한 대가를 주고 소비해야 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나 한 사람도 한국애니메이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관객이라는 인식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